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면 힘들어진다...적당히...근데 그 적당한 적정점을 찾는 게 힘들지...조금은 포기하고 조금은 양보하고.. 사회인이되면 대학을 추억하겟지 대딩보단 군바리.. 그보단 고딩...중딩...초딩...유치원...어린이집...엄마뱃속...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지지만 점점 힘들어진다. 그래서 인생은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꿈을 포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즘 대학생들은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하고, 선생들의 가르침에 논리가 아닌 그릇된 생각들로 도전한다. 그들은 강의에는 출석하지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들은 무시해도 되는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진다. 사랑이니 미신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은 그릇된 논리로 자기들 판단에만 의지하려 들며, 자신들이 무지한 영역에 그 잣대를 들이댄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오류의 화신이 된다. 그들은 멍청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창피해한다…
그들은 축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친구들과 마을을 쏘다니거나 집에 틀어박혀 글이나 끄적인다. 만약 교회에 가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공경으로 가는게 아니라 여자애들을 만나러, 또는 잡담이나 나누려고 간다. 그들은 부모님이나 교단으로부터 받은 학자금을 술집과 연회와 놀이에 흥청망청 써버리며, 그렇게 결국 집에 지식도, 도덕도, 돈도 없이 돌아간다.
-예술이 보는 사람에게 "저쯤이면 나도 흉내 내 봄직하다"라고 생각된다면 감동은 발생할수 없다. 나를 패죽인다 해도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감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사람은
- 여튼 탁월함의 경지까지 오르려면 비교되지 않을때까지 가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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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12. 7 도올 김용옥
이박자와 삼박자는 결국 일박에서 통섭된다. 모든 박자중에서 가장 위대한 박자는 일박이다. 일박은 무박과 통한다. 일박속에는 모든 리듬이 통섭된다. 일박은 통박이다. 일박은 원이다. 일박은 전체다. 스타오(石濤)는 말한다. "태고에는 법이 없었다. 태박(큰 혼돈)은 흩어짐이 없었다. 태박이 흩어지니 곧 법이 스스로 생겨났다. 법은 어디서 확립되는 것인가? 그것은 일획에서 확립된다. 일획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요, 모든 모습의 뿌리다. (太古無法, 太樸不散; 太樸一散, 而法自立矣, 法于何立? 立于一 . 一 者, 衆有之本, 萬象之根) 일박은 시간이다. 일획은 공간이다. 일박은 일획이요, 일획은 일박이다."
내가 黑雨(金大煥)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자정이 넘은 어느 봄날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였다. 내가 그를 알게된 것은 부끄럽게도 마누엘 루트겐홀스트라는 독일 극작가를 통해서였다. 나는 黑雨가 이땅에서 나와 같이 숨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인간의 모든 예술은 인간의 몸(MOM)의 氣의 발출이라고 생각한다. 노래도 춤도 그림도 기악도 조각도 공예도 건축도 생각의 장난도, 모두 몸의 기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기의 표현에는 반드시 공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이 '공부'라는 것은 디시플린(Discipline) 즉 '몸의 단련'이라는 뜻이다. '공부'를 <大學>에서 '修身'이라고 표현했고, 내 기철학의 생리학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자율'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黑雨는 계유생이다. 환갑을 이태 남겨놓은 노인이라면 노인이다. "북은 언제부터 치셨죠?" "중학교 1학년 열세살 때부터 쳤지. 열일곱살 때 육이오가 나서 선무공작대가 되어 개성 . 연안 . 배천 등지로 쏴다녔지. 그리고 8240첩보대에 들어갔다가 스무살 때 공군 군악대로 들어갔어. 거기서 한 8년 트롬본 불고 북치다가 상사로 제대했어. 스물여덟살 때 미8군에 들어가 이봉조 . 길옥윤 . 패티김 . 최희준 . 위키리 같은 친구들하구 북치면서 신나게 돌아다닌거지. 60년대 비틀즈가 유행할 때 88올림픽 때 우리나라에 크게 소개되었던 코리아나를 만들어 북을 치다가, 다시 신중현하구 애드포(ADD4)를 만들기두 했다구. 72년쯤 될거야. 조용필, 이남이하구 같이 킴트리오를 만들었다가 용필이가 그만두는 바람에 나두 그룹사운드를 때려치구 재즈로 들어갔지."
그의 삶의 역정은 20세기를산 모든 예인들의 발자취가 그러하듯이 비천과 허영이 엇갈린 역사의 뒤안길의 영욕을 한 몸에 맛본 인생길이다. 이제와서 숨길 것이라곤, 또 체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리라. 몸의 '공부'인 예술이 보는 사람에게 "저쯤이면 나도 흉내 내 봄직하다"라고 생각된다면 감동이 발생할 수가 없다. 제아무리 요술을 부려도, 패죽인다 해도 거진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감동은 시작되는 것이다.천부적 재능과 공부의 완성이 결합되어 발출하는 기의 심미적 세계, 그것을 나는 엑스타틱 익스피리언스 (Ecstatic Experience, 황홀경)라고 부른다. 黑雨의 모든 몸짓은 나에게 어김없이 이 엑스타틱 익스피리언스를 안겨준다. 나는 그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하나 ! 黑雨의 예술은 너무도 정직하기 때문이다. 재즈란 시나위를 말한다. 시나위란 일정한 박자와 멜로디를 유지하면서, 즉 음의 질서의 기본구조를 유지하면서, 즉 음의 질서의 기본구조를 유지하면서, 상황(느낌)에 따라 자유롭게 변주가 가능한 자유의 세계다. 재즈란 한마디로 '아프리카 시나위'다! 아프리카의 자연발생적, 토착적 음의 질서 (그것은 물론 타악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가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아프리카 노예들의 정감을 통하여 서구문명의 첨단에 접합되어 발생한 예술양식이 재즈라고 한다면, 그 재즈가 다시 김대환이라는 조선반만년의 예맥을 통하여 북의 시나위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이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것은 천지를 둘러싼 대기의 회통이며, 아프리카의 검은 빛과 조선의 아침 빛이 음양의 한 질서였다는 太極相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형을 거부하는 프리재즈의 '최고봉'
"말이야! 북을 한참 친다구 생각할 땐 말이야! 술집계집애들이 주안상을 두드리는데 챙피해서 같이 젓가락을 휘두르지 못하겠더라구. 그런데 요즘와서 생각되는 건데, 걔들이 한박 두드리는게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예술의 극치더라구. 내가 평생 친 북이 걔들 한박속에 다 들어있더라구! 나~참! 허~허~." 인간의 음악은 때림(beat)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때리는 소리가 시간을 형성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간을 형성하는 일정한 때림의 강약에 의하여 어떤 박자가 성립한다는 것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모든 리듬은 바로 이 박자에 근원한다. 박자의 반복의 패턴이 곧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박자는 결국 2박자(duple meter)와 3박자(triple meter)로 인수분해될 수 있다. 2박과 3박은 모든 리듬의 디프 스트럭쳐(deep structure)를 형성하는 것이다. 二는 異다. 異는 이때 때림의 강약의 다름(Difference)이다. 둘이 있어야 다름이 생기고 다름이 있어야 곧 시간의 분별적 인식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박자와 리듬의 출발은 반드시 두 개의 때림(two beats), 그 이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신나게 북을 때리던 딴따라패 김대환은 어느날 大悟의 경지에 도달한다. "모든 박자는 일박에 통섭될 뿐이다. 한번의 때림! 그 때림으로 나의 예술은 완성된다. 모든 박자, 모든 음악은 한번의 때림일 뿐이다. 모든 시간(음)의 장난은 한번의 때림의 연속일 뿐이다. 모든 때림은 모든 박자다 ! 일박은 통박이다 ! 우하하하하하 !" "내 음악은 말야! 지휘자가 따루 필요없다구. 아무나 앞에 와서 막대기 하나 들구말야 둥그렇게 휘휘 저으면 되는 거야. 삼각형이나 무슨 모양새를 그릴려구 애쓸 필요가 없어요." 김대환에게는 호가 두 개 있다. 하나는 如水요 하나는 黑雨다. 黑은 玄이다. 黑은 숨어 있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雨는 비다. 雨는 때림이다. 雨는 비트(beat)다. 비트는 비다. 비는 비트다. 그의 드럼을 듣고 있으면 소나기가 땅을 두드릴 때 숨어있는 수없는 부정형의 카오스 리듬을 듣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가 있다. 그 자연은 바로 그의 우직한 팔뚝에서부터 뻗쳐나오는 몸의 자연이다. 그것은 공부의 완성이다. 기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空의 세계를 표유하는 일박의 자유다. 如水라는 호는 '上善若水'(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는 라오쯔(老子) 선생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가 細刻의 장인으로서 쓰는 아호다. 그는 쌀알 한톨에 {般若心經} 全文 283자를 새겨넣는다. 1990년 "기네스북"에 올라가 있다. 현미경에 노안을 들이대고 텅스텐 마이크로칩으로 왕희지의 서법보다 더 분방한 글씨를 휘두른다. 如水의 작품 앞에선 타이페이 고궁속의 세각이 그 빛을 잃는다. "사람들이 오해를 해! 내 전각의 세계하구 내 북의 세계하구 다른 건 줄 알구말야. 그 두 개는 하나라구." 매크로는 마이크로로 통한다. 마이크로는 매크로로 통한다. "그 우라질 서양북을 평생 치다가 때려쳤지. 그리고 우리북을 찾았어. 역시 가죽은 가죽끼리 통해. 사람의 몸가죽을 울리는 건 쇠가죽이야. 여러 북을 놓고 여러 소리낼 생각말구, 북하나 놓고 모든 소릴 다 찾을 수 있다구 생각했지. 그게 바루 세각의 정신이야." 오른손 검지와 장지사이에 묵직한 방망이가 끼어있다. 장지와 약지사이엔 북채가, 약지와 새끼손가락사이엔 장구채가 끼어있다. 왼손에는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장구채, 서양 드럼채, 두꺼운 북채가 끼어 있다. 두손이 흔들릴 때마다 이 여섯 개의 때림의 주체들은 하나의 북 위에서 천뢰(천지의 대함성)를 자아낸다. 장구채는 리듬을 가르고 묵직한 방망이는 쪼개진 소리들을 하나로 융합시킨다. 거기엔 모든 정형이 거부된다. 나는 북의 명인으로 두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첫분이 一山 金命煥 선생이시다. 그가 타계한 후 내가 만난 이승의 스승이 바로 金大煥선생이다. 나는 흑우선생을 나의 연극 <시간의 그림자>의 무대에 모셨다. 나는 <시간의 그림자>가 막을 내리는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 연출자의 한사람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너무도 격렬한 위선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순간 나는 홀로 한강변을 걷고 있었다. 막이 내리는 순간을 상상하면서 이같이 뇌까렸다. 지금 내가 문예회관 대극장에 있다면 무대에 올라가 김대환 선생 앞에 무릎꿇고 큰절을 올리리라. "당신 한 분만이 진실이었나이다." 엊그제 학전 앞에서 그립던 흑우의 사진이 걸려있길래 우연히 들렀다. 흑우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튀고 있었다. (과장표현이 아닌 실제사실) 그의 프리 재즈 콘서트가 엑스타시의 절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나의 무대에 모셨던 것을 매우 죄스럽게 느꼈다. 저렇게 자유로운 자기의 무대가 있었던 것을... 쯧쯧쯧쯧. 이날 우연히 만난 김현자선생(부산대 교수, 창작무용)은 의미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정사는 태양에 빛나지만 야사는 달빛에 젖어 신화로 남지요."